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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문영희)

[서평] 언어로 만든 집은 다시 죽지 않는다 | 문영희 (월독)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예니 에르펜베크>저/<배수아>역 을유문화사 (2010)

 

“이제는 해체되고 없는 집을 애도하는 진혼곡”

월요일 독서클럽이 예니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읽기로 결정한 것은

어느 건물의 잔디마당에서였다. 나무 잎사귀들의 여린 초록빛이 몹시도 반들거리며

살랑대는 날이었다. 대지에서는 약간의 온기가 올라오고 하늘은 모처럼 푸르렀다.

상큼한 바람과 태양을 살짝 가린 비치파라솔과 커피의 향기, 끝도 없이 수다를 떠는

것처럼 보이는 책 읽는 여자들…

그날의 독서토론은 『숨그네』와 『저지대』에 관한 것이었다. 헤르타 뮐러의,

시적 울림이 가득한 작품에 고양된 우리들이 차기 토론작으로 선택한 것이 예니

에르펜베크의 새 소설이다. 두 작가 모두 사회주의체제 하의 동유럽에서 성장하였다는  

공통점 외에도 창작의 태도와 방식, 작품이 빚어내는 기품에 이르기까지 묘하게 닮은

점이 있어보여서였다. 월요일독서클럽은 예니 에르펜베크의 작품으로는 맨 먼저 국내에

소개되었던 『늙은 아이 이야기』를 읽었었기 때문에 작품 경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늙은 아이 이야기』는 실제 나이와 신분을 지워버린 채 스스로 집단 수용소에서 삶을

이어가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밤중 상가 거리에 빈 휴지통을 들고 서 있는

소녀’는 집도 이름도 부모도 나이도 모른 채 열네 살이라고만 대답한다, 소녀는 그 길로

수용소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로 요약되는 특이한 작품은 동유럽 출신 작가의,

과거체제에 대한 향수가 살짝 배어 있는 것 같다고 의견을 나누었었다.

『늙은 아이 이야기』에 관해 토론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작품 내용과

아주 유사한, 경주 여고생 실종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자작극임이 밝혀져

(2010. 2. 4일 자 인터넷 기사 참조) 월독회원 모두를 경악시킨 일도 있었다. 때문에 국내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작가지만 우리들에게는 무척 친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는 ‘그곳’과 ‘집’, 일생 동안 ‘그곳’을 지키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정원사와,  ‘집’이 완성되던 1920년대부터 집이 해체되던 최근까지 그 ‘집’에서 머물렀거나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 모두에 관한 회고 형식의 소설이다. 작가는 그곳, 집, 사람들을 각각

생명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 구현한다. 차례의 형식부터 내용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음악성을 고려한 듯한 독특한 반복의 기법으로 프롤로그-정원사-농장주와 네 딸- 정원사-

건축가-정원사… 이처럼 두 박자의 리듬감각을 살린 듯한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이야기 구조의 외형은 작중인물 ‘건축가’가 설계한 집과도 같이 단순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은밀하며 사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건축가가 설계한

집의 방 장롱은 비밀 열림 장치가 있고 이중 문 안쪽에 숨겨놓았다. 침대 주변 벽면에는

 세 방향에 붙박이 서랍을 만들어 넣었다. 벽 속에 또 다른 공간을 숨겨놓는 이러한 방식은

소설의 틀 짜기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독일은 사방이 이웃나라들(적들)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내륙국가이다.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와 폴란드에 의해

둘러싸인 독일이 민족과 국가를 유독스럽게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아리안이란 이름으로 상상의 공동체를 확고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경계짓기와 전쟁하기가 자행된 독일 근현대의 역사적 시간을 밑그림으로 하고 소

설은 폴란드 접경지역의 아름다운 빙하호수가 있는 문제적 공간을 주 무대이자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태초에 탄생하여 빙하기를 거치면서 얼었다 녹고, 그것이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를 이룬 빙하호수(메르키슈 호수)와 호수변의 여름휴가용

오두막, 보트를 대는 보트하우스, 그리고 집 등에 머물며 한때의 행복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공간, 그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우애를 다지고 영혼을 고양시키며 핏줄을 확인하고 대지와 숲에 감사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동시에 형벌과도 같은 독일 근현대사와 정치사의

광기와 폭력이 덧입혀진 남루한 ‘벌거벗은 생명’으로도 묘사된다. 그러므로

소설 내용은 가장 폭압적이고 광기 어린 시간의 운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아이러니, 더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결코 변하지 않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공간 그 자체까지 오염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관한 것이다.

고향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강제추방 당한다(건축사).

아리안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마더/머더시티의 시민으로 가스실에서

질식사한다(섬유업자와 그 가족들). 이데올로기 때문에 고향을 등졌다가 시대가

바뀌어 다시 언어의 고향을 찾아 돌아왔건만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작가).

 

공간 또한 시간과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운명에 처한다. 집은 러시아 군인의 점령지로, 히틀러체제의

국가소유로,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소유이자 공산당간부의 휴양지로, 추방당한

유대인 자손에게 반환되었다가 결국 경제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소설 내용은 시간이 휘두르는 거대한 폭력 앞에 노출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한때 머문 수많은 개인들에 대한 추도사이자, 이제는 해체되고 없는 집을 애도하는

진혼곡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런 내용, 즉 ‘무엇’에 관하여 썼느냐보다는 그 무엇을

‘어떻게’ 담아내었는지 그 틀과 디테일에 관한 것이었다. 사건과 사고思考는

가장 긴장되게 축약되어 있다. 그 응축된 단어나 문장을 풀어헤치면 개인

개인의 극한의 고통과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서사와

설명위주의 문장은 과감하게 절제하거나 배제한 뒤 리듬감 있는 은유적

단문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후렴과도 같고, 주술과도 같은 울림을 준다.

따라서 작품의 부분 부분은 노래로도 시로도 읽힌다. 문장의 반복을 통한

상징, 동일한 어의 효과적인 재배치를 통한 강조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면 벽 속에 붙박이 서랍이

숨겨져 있는 것을 모르듯이 맥락의 고리를 놓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히틀러 광기시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가스실에서의 작중인물들의 희생

등은 ‘하일’이라는 단어 하나에 삼투되어 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을

위해서 지어준 집의 장롱 속에서 일어난 거대한 비밀은 ‘유머’라는 단어 하나로 함축한다.

 

또한 작가는 호숫가와 집이라는 공간을 단단히 고정시켜놓고 그 공간 속의 시간을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동일하면서도 다른 노래를 제시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과 인물은 동일한 공간을 통해 환기된다.

1940년대 러시아군을 맞이하여 전쟁을 치렀던 안나의 옷장은 통일독일 이후

작가의 손녀딸이 숨어 있던 옷장이다. 열쇠에 매달린 금빛 낚시찌는 1920년대에도,

1980년대에도 동일한 보관함에 걸려 있다.

 

독일이 통일됨으로써 동독에 속해 있었던 호숫가의 오두막과 집은

토지반환청구권의 분쟁에 휩싸인다. 이 과정에서 집은 옛 소유권자의

자손에게 이양되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헐리게 된다. 작가는

집요하게도 그 빈집에 기거하는 마지막 주자, 작가의 손녀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추억의 집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청소작업을 진행한다. 마치, 지노귀 굿에서

혼령을 물로 깨끗이 정화하는 작업처럼, 작가는 불법점유자인 그녀로 하여금 집안의

집기들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정화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결국 집은 죽었다. 차례차례로 해체된 집은 빈터로 남음으로 주변의 풍광은 잠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다. 이제 추억의 그 집은 없다. 집이 없으므로 고향도 사라진 것인가?

 

어쩌면 작품은 여기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황무지를 뚫고 나온 잡초가 어느덧

초원을 이루듯 그렇게, 어떤 기억은 그 누구도 해체하지 못할 오롯한 언어의 집을 짓는다.

언어로 만들어진 그 집은, 문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다시 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