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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식인주체의 아이러니칼한 윤리학 (타라)

식인주체의 아이러니칼한 윤리학

(임옥희,『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 여이연, 2010)


 

   수상한 시절을 살고 있는 나와 우리 앞에 우리가 가진 불안감을 언어화한 의미심장한 말들이 들려왔다. 임옥희 선생님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2010년의 현재는 모든 가치가 화폐로 환산되며 정치적 구호나 차이까지 미학화되어 팔려나가는 신자유주의시대이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있다는 환상의 “부르주아 독재(13)”시대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유롭게 선출한 대통령은 강을 파고 2년 전 촛불시위를 반성하라고 호령하고, 욕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지방선거보다는 축구나 천안함 침몰 사태의 진실과 빨갱이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시대를 저자는 ‘폭력의 시대’라고 말한다. 폭력의 시대에는 온갖 것들이 죽어나간다. 신도 인문학도 노동운동도 페미니즘도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또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것인가?


   “사회가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주체의 존재자체가 폭력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 폭력에 세례를 받아야만 한 개인이 주체로 탄생하게 된다면 누가 과연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런 딜레마에 빠져있는 폭력적인 주체가 어떻게 타인과의 공존에 열릴 수 있는가(16)”하는 것이 저자가 폭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며, 이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이를 말하기 위해 저자는 자본, 교육, 가족, 모성, 육체, 타자, 문학, 유머, 일상, 채식 등 일련의 이야기보따리를 차근차근 풀어간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항상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의 노동력, 여성의 몸, 여성의 말이. “이윤을 남기는 것이 선이고 선이 이윤인 시대(47)”에 여성의 노동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며 비정규직으로 유연해진다. “매릴랜드의 닭공장에서 일하는 한국계여성이 백인상층 부르주아 남성을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없고 그들과 직접적인 갈등이 생길 일도 없다(223).” 값싼 노동력을 찾아 자본이 이동하는 시대에 인종과 하층계급과 젠더 사이의 문제는 뒤얽히며 폭력으로 점철된다. 인권을 위한 법전화는 “더 큰 국가 가부장에게 가서 남편/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는(69)” 것에 불과해지거나 다른 여성(성매매여성, 국제결혼 이주여성 등)을 배제한 것이 된다. 계급재생산을 위해 미친 듯이 자녀교육을 관리하는 모성의 광기는 “핵가족 이상을 해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핵가족을 유지(135)”하는 기러기 가족을 낳았다. 1997년 IMF 사태에는 ‘아버지’ 담론이 지배했던 것과 달리 2008년에는 엄마가 대세다. 『엄마를 부탁해』와 영화 <마더>가 보여주는 엄마 열풍은 봉건적인 가장, 절대적 가치로서의 아버지가 실종된 시대에 이제 “개인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엄마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마더>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의 무죄방면을 위해 중요 증인을 살해한다. 이 엄마의 광기와 영어교육을 위해 자녀의 혀를 수술시키는 엄마와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때의 “엄마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법 너머에 있는 선(혹은 악으로서의 모성)을 구현한 인물(155)”로 “법을 초월하여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핏줄에 목숨을 거는 만큼 공공의 선과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러한 “가부장 질서 너머에 있는 광기의 모성과 우리 모두가 공모(156)”하는 곳이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어머니는 신자유주의와 만나 다시 변화한다. 영화 <구글베이비>는 이스라엘 남성게이커플이 동유럽 여성의 난자를 구매해 인도 뭄바이 여성을 대리모 삼아 자신의 아이를 갖는 모습을 보여준다. 돈만 준다면 뭐든 구하지 못할 게 없는 이 시대는 여성의 몸 또한 시장의 논리로 포섭한다. 여성이 “알엄마/자궁엄마/양육엄마(175)”로 나뉠 때 모성, 친권, 혈연, 친족과 같은 모든 사회체계는 다시 구성되어야 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정보혁명과 유전자 혁명시대에 이르러 유전자 변형테크놀로지를 통해 우리는 “가자미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잘 부패하지 않게 된 토마토(274)”를 먹는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모호한 혼종의 시대”에 기존의 1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젠더 등과 같은 온갖 ‘정체성의 파괴’가 곧 타자에 대한 배려의 윤리학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정치적인 신념을 수용하기도 전에(276)” 이미 우리/제 3세계 여성들은 잡종적인 상태에서 1세계의 가정의 가사노동과 보살핌노동을 대신하거나 주요경비절감의 대상이 되어 노동착취를 당한다. “울프처럼 자기만의 방 하나를 소유하고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면, 이들[제 3세계 여성들]에게 글쓰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부엌이든 지하철 안에서든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홈이 없다. 그래서 모든 공간이 글쓰기 장소이자 글쓰기 텍스트다. 이들의 미학적인 규범은 경험에서 우러난 친밀성, 직접성, 주관성에 기초 해있다(282).”


   이러한 주변부의 여성들은 “1세계의 고갈된 상상력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고(289)”있는 타자들이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타자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이성애의 규범을 위반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을 그린 동성애 코드가 최근 영화를 넘어 일일드라마에까지 넘어오게 된 것은 타자가 중심의 상상력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는 동성애와 함께 자본이 극대화한 욕망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육식을 거부하는 소설이 등장함을 지적한다. “한때 레즈비언 채식주의자야말로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농담이 있었다. 이성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라는 것만으로 정치적이며,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채식을 하는 것만으로 윤리적이라는 것이다(347).” 저자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언급한다. 여기에는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가 등장한다. 평범한 남편 ‘나’는 점차 아내가 육식뿐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불감증과 거식증에 이르자 그런 그녀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저자는 작가 한강이 “인간사회의 폭력성과 자본의 식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은유적인 거식에서 찾고 있다(356)”고 본다. 멜라니 클라인은 인간은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혹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이며 “필연적으로 타자를 먹어서 삼키고 소화시키는 폭력적인 주체, 삼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식인주체를 이론화했다(239).” “찢고 뜯고 깨물고 물어 삼키려는 폭력적인 주체의 탄생은 인간존재의 취약성과 그로인한 불안에서 기인(239)”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결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인간은 우울한 존재(357)”라고 언명한다. 한강이 그린 ‘아내’는 이러한 인간의 “윤리적 불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같은 폭력에서 피할 수 없는 가해자임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있는 폭력성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먼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비로소 저자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정치가 이해된다. 채식주의 뱀파이어는 스페인의 망명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의 <채식주의 흡혈귀>라는 그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바로의 그림에는 “퀭한 눈, 훌쭉한 뺨,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허기를 채식으로 달래고 있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묘한 여유와 유머로 표현되어있다(17).” 곧 쓰려져 죽을 것 같은 수척한 모습으로 “식탁 아래에 토실토실 살찐 수탉이 앉아있음에도 동물을 피를 빨 수 없는(357)”, 또는 빨지 않는 흡혈귀의 모습은 저자가 말하는 ‘공존’을 보여준다. 결국 ‘채식주의 뱀파이어 정치’는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가 타자를 삼켜야함에도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러니에 대한 은유(17)”이다. 빈혈에 시달리며 죽어가면서도 닭을 잡아먹지 않는 흡혈귀의 모습과 육식거부를 통해 작가 한강이 그려내는 “식인주체의 자기소멸에의 충동”을 저자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아이러니컬한 윤리학(360)”이라고 말한다. “공존의 가치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드러난다. 때문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359)”으며 “그만큼 폭력의 시대에 공존의 가치를 찾는 것이 만만치 않다(360)”. 자신이 죽지 않는 한 타자를 삼킬 수밖에 없는 식인주체의 운명을 자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지금 우리’의 윤리 또는 페미니즘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지금,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진정 채식주의자 뱀파이어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