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요즘 읽었던 상당수 소설들은 소설적인 짜임새보다는 그저 이야기로 넘쳐났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 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에 닿았다. 많은 소설들이 이해하기 힘든 분노, 과도한 구라, 지나친 자기연민을 여과없이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분량은 왜 그렇게 엄청난지. 수다로 끓어 넘치는 소설을 읽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독자에게 생각할 여백을 주지 않았다. 이야기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맬 필요도 없었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실타래만 따라가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플롯도, 상징도, 형식도 없었다. 아무리 소비가 미덕인 사회라고는 하지만, 작가마저 자기 존재의 처소인 언어들을 낭비하고 남용하다가 언어의 쓰레기 더미로 배설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언어의 향연이라기보다는 언어의 착취이고 독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독자의 시간을 강제 징수하는 것이다.
언어의 경제성과 여백이 있는 소설이 그리웠다. 단지 이야기의 과도한 소비를 권장하는 소설이 아니라 독자의 시간을 구원해주는 소설과 만나고 싶었다. 월요일독서클럽이 구태여 모여서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도 까다로운 시선들이 모여서 그런 소설을 찾아내려는 노력에 있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소설 가운데서 그런 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법적인 시간이 열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까칠한 시선들이 고른 작품이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저지대>>였다.
<<숨그네>>에서 ‘나,’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열일곱 살이었던 1945년 1월 15일 새벽 3시, 러시아로 끌려간다. ‘나’는 참전한 적도 없었던 루마니아 소수민족출신 독일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에게 그들은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져야할 그냥 독일인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소설은 ‘나’가 직접 경험한(여기서 ‘나’는 오스카 파스티오르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유명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지옥같은 세월을 헤르타 뮐러가 회고적으로 기술한 것이었다. ‘나’의 자전적인 경험을 왜 헤르타 뮐러가 증언하려고 했던 것일까?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배고픈 짐승의 세월이자 세계의 밤이었다. 그것은 극한의 굶주림으로 기억되는 ‘뼈와가죽의시간’이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에게 더 이상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사라진다. 선과 악도 없어진다. 인간은 오로지 ‘배고픈 천사와 짝짓기’하는 짐승들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먹는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수용소 부지는 캐러멜, 수용소 입구는 갓 구운 빵,’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따스한 살구, 공장의 나무 울타리는 설탕 입힌 견과, 공장 입구는 오믈렛’이었다. ‘세상과 나의 관계는 오로지 먹는’ 것이다. 저 멀리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는 ‘배불리 먹었던 시절에 대한 배고픔’이다. 이처럼 허기를 맛있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마법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말의 힘이었다. 러시아인들에게 끌려가는 순간 할머니는 어린 손자에게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말한다. 그 말은 주문처럼 그와 동행하고 굶주림의 세월 속에서도 살아남도록 해주는 마법이 되었다.
헤르타 뮐러에게 말은 사물에게 건네는 시간의 선물이다. 이 작품에서 사물들은 목소리와 역사를 가진다. <<저지대>>에서 어린 화자인 ‘나’에게 여름한철 동안 따스한 연못의 초록색 수초에 살랑거리는 물살을 가르며 개구리를 잡아먹고 자맥질하면서 포동포동하게 살찐 오리는 도살의 순간에도 온기의 냄새, 반쯤 소화된 개구리 냄새, 여름 한철의 초록 냄새를 온통 묻히고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숨그네>>에서 어린 시절 과수원에 놓여 있던 낡은 벤치는 헤르만 아저씨이고 의자는 루이야 아주머니다. 스웨터를 입고 그 벤치에 앉았던 어머니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웨터에 달린 입이 말한다. 과수원 풀밭에서 구르면 하늘은 땅이 되고 하늘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풀이다. ‘나’에게 물건은 용도가 다하면 폐기되는 쓰레기가 아니다. 접시, 컵, 소금통, 칫솔, 비누, 열쇠, 문, 장롱, 탁자들과 같은 사물들은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물건들을 60년이 넘도록 사용한다. 낡았지만 새 것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나’와 구분되지 않는다. ‘나’가 바로 그 물건이 된다. 어린 동생 로베르토에게 ‘나’는 아무 것이나 집어넣는 서랍이다. 랑데부 장소에서 ‘나’는 피아노이고 ‘나’의 파트너는 침대 테이블이다. 고양이, 갈매기, 토끼로 불리는 그들은 공원에서 들짐승처럼 야합한다. 그들은 공원의 자작나무가 되기도 하고 전나무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사물로 번역되고 사물은 인간으로 번역되는 새로운 존재의 질서가 극한상황에 처한 나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고 다른 세계와 다른 거처들을 창조하도록 해준다.
<<숨그네>>가 주었던 아이러니는 숨쉬기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끔찍한 상황을 읽으면서 숨쉬기가 편안해졌다는 점이었다. 이 말은 견디기 힘든 극단적인 상황을 미학적 베일로 가려줌으로써 편안한 책읽기를 도와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저마다 언어가 있는 사물들의 세계는 오로지 행복해지는 것만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무통증 행복주식회사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한 동정심, 자기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나르시시즘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인간은 사물이라는 타자의 거처로 들어감으로써 한순간 새로운 존재와 조우하고 다른 존재로 변형된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시적 은유가 고통의 미학적 소비가 아니라 윤리적 지평을 열어두는 지점이었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자기 성찰의 대상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타자의 자리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수용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결코 증언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이 아마도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헤르타 뮐러가 안전한 거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면서 다시 쓴 이유인지도 모른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영도(zero)의 경험을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수용소 안의 살아 있는 유령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윤리적 심연을 경험한 자들은 불가능한 증인이 된다. 수용소에서 5년을 견디고 할머니의 말대로 ‘나’는 살아서 귀향한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나이프와 포크로 음식을 먹는 법조차 까먹는다. 짐승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인간의 언어를 상실했으므로 증언할 수 없다. 언어이전의 상태에서 살았으므로. 귀향 후 ‘나’는 자기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한다. 기를 쓰고 기록하려고 할수록 낱말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고 자기 경험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커다란 불행이었다.'
‘나’가 수용소에서 가지고 나온 보물 중에서 가장 무겁고 6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노동중독이자 노동강박이다. 노동강박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자유에의 공포는 ‘나’의 뇌수를 타고 올라가 ‘나’를 노동의 노예로 만든다. 나에게는 일상이 강제수용소가 된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나도.
이 소설의 각 장은 산문시라고 해도 좋을만한 소제목들이 붙어 있다. <짐 싸기에 대하여>에서 ‘나’는 고르고 고른 끝에 두 권의 책을 골라 돼지가죽 트렁크에 챙겨 넣는다. 그것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적어도 5년 동안 읽고 또 읽을 만한 책을 고른 셈이었다. 하지만 배고픈 천사의 시간 앞에서 그 책들은 빵 한 조각의 가치도 없다.
이 소설을 읽는 용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오늘 필자는 몇 십 년 만에 국군장병아저씨에게 보낼 위문품꾸러미를 꾸렸다. 마치 <<숨그네>>에서 ‘나’가 돼지가죽 트렁크에 짐을 챙겨 넣듯이. 제대할 때까지 면회를 갈 수 없는 곳,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곳인 민통선 안의 G.O.P에 배치된 국군아저씨에게 보낼 소포꾸러미였다. 무슨 책을 넣어서 보낼까 고민하다가 헤르타 뮐러의 책을 골랐다. 끔찍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갈 철책선의 시간 속에서 <<숨그네>>와 <<저지대>>가 느린 호흡으로 그와 동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런데 철책선 앞에서 소설이 필요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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