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시간이 앞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 최인자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저/<김선형> 역들녘 (2003)
“되돌아온 과거의 무언가를 맞이할 것인가, 내쫓을 것인가”
월요일 독서클럽에서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를 읽은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토니 모리슨은 물론 저명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빌러비드』라면 그녀의
대표작이자(토니 모리슨은 이 작품으로 198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두말할 나위 없는
미국 문학의 고전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고 난 우리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아니, 넌더리를 내거나 살짝 몸서리를 치고는 얼른 물러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친 듯했다. 쏟아지듯 넘치는 말들, 찢기고 부풀어 오른 살점, 빼앗기고
잃어버린 몸들, 터져 나오거나 혹은 삼켜버린 비명들, 너무 많은 원한과 설움과 체념,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자기 자식 세 명의 목을 톱으로 베어버리고 피와 젖을 철철 흘리며
우뚝 서 있는 흑인 여자, 어떤 반론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숨 막히는 어머니의 사랑.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들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 역사이며, 그것도 명백한 희생자의
역사라는 사실이 우리의 말문을 막았다. ‘덥다.’ 결국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은 그뿐이었다.
5월에 읽기에는 『빌러비드』는 너무 덥고 끈끈하고 숨이 막혔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입 닥치고 그저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물론 냉소(이게 전부일까? 건너뛴 이야기, 감추어진 면은 없을까?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이란 불가능할까?) 같은 것은 감히 품을 수도 없고 품어서도 안 된다.
그 앞에서 우리(노예해방 이전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백인은 더더구나 아닌)는 시대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가해자의 자리에 동참하고 죄책감을 나누어 가진다. 희생자는
언제든 그 모습을 바꾸고 서로 겹쳐질 수 있으므로. 유대인으로, 스탈린 치하 수용소
죄수로, 정신대 할머니로, 해고당한 노동자로, 학대받는 어린아이로. 그러니 가해자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러나 곧 하나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5월이 찾아오는 동안 『빌러비드』는 내게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고통받은 흑인들의 과거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고집 세게 산 자의
곁으로 되돌아와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달래줄 것을 요구하는 죽은 자의 이야기로.
기억 저편으로 내쫓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우리 앞에 불러 세울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매번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빌러비드』에서 죽은 자는 유령으로 출몰하다 못해 아예 살아있는 육신을 입고 낯선
손님으로 집을 찾아온다. 사실 『빌러비드』를 현재의 시점에서만 보자면, 두 손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사연이 뒤엉켜 있는 듯 보이는 이 소설에서 정작 일어나는
사건이라고는 마을 사람들조차 왕래하지 않는 고립된 집에 어느 날 갑자기 두 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것뿐이다. 떠돌이 흑인 남자 폴 디와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빌러비드, 이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시이드와 그녀의 딸 덴버가 살고 있는 124번지에서는
아기 유령이 이따금 일으키는 소동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파란만장한
사건과 들끓는 감정들은 전부 지나가버린, 그래서 지금은 완전히 덮어버린 과거일 뿐 이
두 모녀에게는 세상과의 교류도, 변화도, 미래도 없다.
그러니까 빈 껍데기 같은 이 집에 격한 이야기의 소용돌이가 치고 ‘현재’란 시간이
작동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문을 열고 낯선 손님을 맞아들이는 그 순간부터인 것이다.
첫 번째 손님인 폴 디는 과거에 ‘스위트 홈’이란 노예 농장에서 시이드와 고통스러운
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흑인남자로, 이 집에 깃든 아기 유령을 쫓아내고 시이드와 덴버가
집 밖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처음으로 마을의
축제에 참가하고 어쩌면 정체된 시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때, 두 번째 손님인 정체 모를 아가씨가 집 앞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시이드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빌러비드’란 말을 듣고서, 공교롭게도 자신이
사내에게 몸을 팔아가면서까지 죽은 딸아이의 묘비에 새겨 넣은 글씨(Beloved)와
똑같다는 사실을 떠올리지만 이 아가씨가 이 집에서 내쫓긴 아기 유령이며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 갓난아기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18년 전, 들이닥치는
노예사냥꾼의 손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그 작은 목 밑에 톱니를 그어야
했던 아이. 간당거리는 머리에서 피를 펌프처럼 뿜으며 죽은 아기일 거라고는.
결국 두 손님 모두 다시 되돌아온 시이드의 과거인 셈이었지만, 그들은 시이드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를 쓴다. 폴 디는 아픈 과거를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로 옮겨
가기를 원하는 반면, 빌러비드는 아직 채워주고 갚아야할 빚이 남았음을 상기시키며
오히려 과거로 되돌아가 거기에 머물기를 요구한다. 폴 디의 과거에서 시이드는 몸을
빼앗기고 남편과 아이를 잃은 피해자이지만, 빌러비드의 과거에서 시이드는 충분한
사랑도, 납득할 만한 해명도 주지 않고 한 아이의 목숨을 끊어버린 가해자이기에.
시이드는 그 빚을 갚으려는 듯, 빌러비드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주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들려준다. 빌러비드 또한 자신의 결핍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어머니의 모든 것을 독점하면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또 요구한다. 마침내
빌러비드는 영원히 이 집에 머물면서 시이드를 삼키고 마지막 남은 그녀의 딸 덴버까지
삼켜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어머니의 뒤늦은 갚음만으로는 빌러비드에 대한
충분한 애도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작 빌러비드가 산 자들의 곁을 떠나는 순간은 마을 여자들이 돌아온 죽은 딸을 쫓겠다며,
얌전히 뒤에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 과거라면 발로 짓밟아서라도 말을 듣게 하겠다며
이 집으로 몰려올 때이다. 18년 전 달려오는 노예 사냥꾼을 보고도 그저 침묵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영아 살인에 동참했던 이들이 현관 앞에 선 빌러비드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요물이 전혀 무섭지 않고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시간이 앞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낯선 모습을
하고 찾아와도, 지나간 과거의 무언가가 되돌아온 것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들에게
문을 열어 맞이할지, 아니면 여전히 다시 내쫓을지 우리는 두려움 속에 매번 결정해야
한다. 이 손님들이 가져온 것이 아픔일지 원한일지 화해일지 진정한 망각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늘 되돌아오는 그것을 번번이 내쫓기만 하는 한, 우리는 시간 어느 한
지점에서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잊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그걸 만질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일단 손을 대었다 하면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건 다른 사람한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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