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임옥희
▪ 판형/쪽수: 국판 변형/341쪽
▪ 발행일: 2020년 8월 25일
▪ ISBN 978-89-91729-40-7 93800 ▪ 책값: 20,000원
▢ 기획 취지
이 책에서 ‘모던 걸’은 자기 시대의 전위로서 모던 걸이라기보다 이제 보통 명사화된 1920년대 메트로폴리스의 신여성 현상에 분석을 한정하고자 한다. 신여성을 하나의 ‘현상’으로 접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과거분사처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 정보, 소문, 담론을 통해 재현되고 재해석을 거치면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다. 특정한 현상으로서 진정한 원본 신여성이 있고 그들의 사본으로서 모방하는 신여성이 별개로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근대 시기의 신여성 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당대의 남성 지배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남성 지배체제에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공모하면서도 일탈했고, 충성하면서도 배신했으며, 협력하면서 저항했다. 이와 같은 모순적인 양가성의 층위를 동시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고 그것에 공손하게 복종한 여성들에게서도 무의식으로 드러나는 젠더 정치성을 찾아낼 수 있고 그 역도 또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유사 이래 억압받고 억눌려 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성들이 남성지배의 역사에 복종하면서 수동적인 희생자 역할에 만족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담론으로 재현된 신여성들이 보여준 노골적이면서도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가면(masquerade)전략에 주목한다면, 기존의 관점과 차별화되는 분석이 가능할 수 있다. 기존의 다수 선행연구는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각성된 ‘진정한’ 신여성 혹은 의식의 각성은 없으면서도 신여성의 겉모습만 흉내 내고 가장하는 모던 걸로 여성을 위계화해왔다. 이 글은 ‘진정한’ 신여성을 미메시스 하는 ‘모단 걸’들을 그런 분류로부터 구출하고자 한다. 신여성 안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여성‘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진정한’ 원본 신여성을 특정하기란 어렵다. 신여성의 실체를 고착화하는 대신 ‘신여성 현상’이라고 지칭한 것은 재현된 담론으로서 신여성을 의미하고자 함이다
▢ 책 소개
이 책에서는 1920년대라는 특정한 시대에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살았던 다형 도착적인 신여성들을 대략 물신주의자, 레즈비언 뱀파이어, 젠더퀴어 멜랑콜리아, 히스테리증자, 붉은 혁명 투사 등으로 범주화했다. 탐욕스럽게 자원을 ‘탕진하는’ 물신주의 여성들은 근대가 가져다준 소비 공간과 공모하면서 가부장제에 기생하는 여성들로 치부되지만, 그들의 ‘도착적’ 욕망은 이성애 섹슈얼리티와 공모하면서도 일탈하고 자본주의의 생산궤도에서 탈주하는 얼룩이었다. 그들의 수동적 공격성은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숙주를 변형시키거나 치환하려는 충동과도 맞닿아 있었다. 레즈비언 젠더퀴어 멜랑콜리아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애도하면서도 그들과 결코 작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랑의 종교의 신봉자로서 자부심과 사회적 비체로서의 수치심 사이를 오가는 우울증자들이었다. 외관상 현모양처이자 효성스러운 딸이며 다정한 누이로 패싱하는 순종적인 히스테리 여성들은 아픈 몸으로 자기 반란을 도모했다. 히스테리증자의 반란은 끝내 기존 가족 질서로 재포획되고 봉합되는 것으로 비판받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아픈 몸이라는 가장무도회를 연출함으로써 가부장제 안에서 지적 권력을 확보해냈다. 남자 형제들과 경쟁하면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싶어 했던 붉은 혁명 투사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더 많이 챙겨간 공정하지 못한 형제들을 시샘하고 아버지에게 매를 들도록 부추기는 배반의 정치를 통해 사회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여성 현상들이 표출되기까지는 메트로폴리스가 주는 익명성이 한몫했다. 도시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환상처럼, 메트로폴리스의 익명성은 다른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는 잠정적인 해방구였다. 그로 인해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적, 전통적 지역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퀴어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가 부여해준 일자리 소득과 경제적 독립은 개인들에게 다양한 성적 경향성과 성적 자율성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남성적인 여성성으로 가장무도회를 하고, 드랙을 연기하면서 규범적인 젠더 정체성, 이성애 정상성에 균열을 가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올바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종종 보수적이고 흔히 인종차별적이며 가끔 파시즘에 동조했다. 전후의 반유대주의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이면서도 반유대주의에 가세하기도 했다. 성적으로는 급진적 레즈비언이면서 정치적으로는 반동적인 경우도 있었다. 성적 소수자로서 그들이 욕망한 것은 정치적 전위에 서서 투쟁하기보다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생애 서사를 누릴 평등한 기회였다. 이처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는 다형 도착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자기 삶을 견디고 바꾸고 사랑했다.
이 책의 본론은 1장 「근대성과 젠더」에서 1920년대 대도시의 퀴어한 현상들의 다양성과 그 의미에 대한 이론적 개괄을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대도시를 매혹적인 위반의 공간으로 만든 상호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여성들에 대한 지리학적 탐사에 나선다.
2장 「폭식하는 물신주의자」에서는 자본주의의 상품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출현한 ‘소비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물신주의의 여성적 의미를 밝힌다. 사치의 화신인 애첩들이 보여주듯이 소비하는 여성들은 물신주의적 향락에 빠짐으로써 여성의 욕망을 감시해 온 가부장제를 이탈하는가 하면 남성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온 남성들에 대한 보복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3장은 미국이나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공간 이주자가 되어 파리의 세느강변에 모여 살며 “레즈비언 르네상스”를 재현했던 내털리 바니/르네 비비앙, 거트루드 스타인/앨리스 B. 토클라스, 주나 반스/셀마 우드의 삶과 사랑 그리고 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은 “무인지대의 주인 없는 땅”으로 지칭된 런던에서 남자 복장을 하고 자유를 구가하며 여자들끼리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여성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를 트랜스섹슈얼,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를 포괄하는 젠더 이주(gender immigration) 서사로,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을 트랜스젠더나 레즈비언으로 경계 짓기 어려운 트랜스젠더퀴어의 서사로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성 정체성이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일깨우는가 하면 퀴어 멜랑콜리아로 살아가는 일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5장 「히스테리 페미니스트」는 패전 후 독일 사회가 충격에 휩싸이며 기존 질서의 권위가 추락한 틈을 타 베를린이나 비엔나에 있는 정신분석가의 진료실을 거점으로 삼아 가부장제를 공격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생리적, 신체적 원인을 결여한 신경마비, 경직과 마비, 발작, 간질성 경련, 틱 장애, 만성 구토, 거식증, 시각장애, 시각적 환영 등으로 표출된 여성의 히스테리는 “남성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정치를 논하고, 경제를 장악하고, 예술을 지배할 때,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여성들이 드러낸 무의식적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6장 「붉은 정의의 혁명 전사들」은 혁명의 도시인 모스크바와 식민지 근대 도시 경성을 무대로 계급 혁명을 통해 여성 해방을 실현하고자 했던 붉은 여전사들의 생애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붉은 여전사들이 혁명에 가담한 것은 규범적인 여성성을 전시함으로써 남성의 사랑을 얻고 성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보상을 받기보다 남자 형제와 동등하게 이익, 권리, 권력을 나누어 갖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 책의 목차
서론
익숙하고 낯선 신여성 현상
참정권 운동과 공적 ‘공간의 침입자’들
1장 근대성과 젠더
메트로폴리스의 퀴어 공간들
근대적 정동의 젠더화
근대적 시공간의 젠더화
근대적 남성 히스테리: 포탄 충격
감각의 위계화와 시각의 젠더 정치
근대적 복장의 정치(1): 댄디즘과 동성애
근대적 복장의 정치(2): 신여성과 크로스드레싱
근대적 사피즘과 퀴어성
2장 폭식하는 물신주의자들
페티시와 여성적 주이상스
폭식증자와 에로스 경제
보철화된 여성들
탕진하는 여성들
3장 레프트뱅크 레즈비언 코뮌
동시대의 비동시성으로서 파리의 레즈비언들
내털리 바니: 폴리아모르 사피스트
르네 비비앙: 레즈비언 거식증자
주나 반스: 레즈비언 우울증자
거트루드 스타인: 교차언어적 아방가르드
4장 유쾌한 사피즘과 퀴어 멜랑콜리아
주인 없는 땅
사피즘과 ‘다른’ 양성성
젠더 이주 공간으로서 ≪올랜도≫
≪고독의 우물≫과 퀴어 멜랑콜리아
5장 히스테리 페미니스트
근대적 증상으로서 히스테리 여성들
안나 O의 개인극장
도라의 유혹적인 열쇠
새로 태어난 여성
히스테리 여성 분석가가 되다: 카렌 호나이
6장 붉은 정의의 혁명 전사들
붉은 혁명 전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날개 달린 에로스와 붉은 사랑
경성의 콜론타이 허정숙
마무리
▢ 저자 소개
임옥희
말과 글만 가지고 삶이 가능했으면 했지만 불/가능한 꿈이었다. 지금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 덕분에 삶의 겸손과 감사를 배우는 중이다. 장기지속적으로 공부하는 여이연 사람들이 있어서 공부하는 삶의 특혜도 누리고 있다. 그런 결과물들이 ≪주디스 버틀러 읽기≫,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공저),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젠더 감정 정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공저) 등이다. 남아 있는 나날 동안, 글과 말과 삶의 코바늘뜨기를 하면서 쉬엄쉬엄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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