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는 타자에게 연루되었다 [2010.04.16 제806호] |
[월요일 독서클럽] 조용한 독서를 ‘사회적 행위’의 느낌으로 이끄는 존 쿠체의 소설, 노인의 은밀한 열망을 그린 <슬로우맨> |
소설을 읽나요? 사람들에게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읽나.”
“독서클럽까지 결성해 소설을 읽다니 노력이 가상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때면 소설을
즐겨 읽는 나는 사회의 잉여 존재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상대방에게 이런
걸 묻고 싶어진다. 혹시 당신은 뭔가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편인가요? 예컨대, 자신에 대한
믿음들.
이렇게 묻는 건, 소설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모두 내가
몰랐던 남의 이야기, 옆집의 이웃부터 다른 성·인종·계급·민족의 이야기였다. 그 낯선
목소리에 일정 시간 머무르다 보면 수많은 차이로 이별하는 남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답들은 난처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물론 소설 읽기를 타인에게 직접 연루되는 ‘행위’라고 부를 수는 없다.
타인의 내부를 이해함으로써 나를 성찰하는 과정이긴 해도 사회적 행위라고 부르기에는
독서란 너무나 조용한 침묵의 과정이니까.
그런데도 존 쿠체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남의 내부를 이해하는 데서 나아가 뭔가
행위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존 쿠체가 집요하게 다뤄온 주인공들이 모두 경계에서
격렬하게 투쟁하는 인물이어서일까. 존 쿠체의 주인공들은 인종·언어·계급·성의 문제에서
중심과 주변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중심에서 밀려나며, 주변으로
들어갈 때 격렬한 통증을 겪는다. 국내에 최근 번역된 쿠체의 장편 <슬로우맨>
(들녘 펴냄)도 역시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다룬다.
<슬로우맨>은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 노인 폴 레이먼트가
주인공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백인 이민자이며, 자식도 가족도 없는
소심하고 차가운 성격의 남자다. 그에게 있는 건 사진사 시절에 벌어놓은 돈과 아파트,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초기 포슈리란 사진작가가 사람들을 찍었던 원본 사진
수집품뿐이다. 전적으로 남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장애인 처지에 놓인 노인 폴은
발칸반도 출신의 30대 간호사 마리야나에게서 간호를 받게 된다. 유부녀 마리야나를
폴은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폴은 마리야나의 사랑을 얻으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주려고 한다. 이 과정의 잡음들이 소설을 이룬다.
<슬로우맨>은 최근 세계의 노작가들이 탐닉하는 젊은 여성에 대한 노인의 사랑을
다룬다. 하지만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이나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
샐먼 루슈디의 <분노>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처럼 노인 남성 주체가 어린 여성을
사랑하면서 느끼는 심리적 슬픔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슬로우맨>은 이민자라는
위치를 이야기 내부에 포함시키면서 좀더 복잡한 사회학적 지점을 보여준다.
폴은 늘 간호사 마리야나가 발칸반도 출신임을 강조하며, 그에게 정확한 영어를
가르쳐주려 애쓴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원본 사진 수집품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에
역사가 있음을 알려주려고 한다. 폴은 항상 마리야나에게 베푸는 오스트레일리아 남성
주체로서 자신을 설정하려 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폴의 사랑 속 진정한 욕구는
마리야나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이민자 나라에서 가족과 언어와 역사를
새로 써내려는 열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의 자리를 다시 되찾기 위한, 가족과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은밀한 열망! 과연 폴의 열망은 실현될까.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소설 중간에 생뚱맞게 끼어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인데,
코스텔로는 존 쿠체의 예전 소설 속 주인공인 여성 노작가다. 이 여성 작가의 출연이
소설 구조를 해체해 독자의 몰입을 망쳐버린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을 때 쿠체는
나름의 보답을 선사한다. 이 몰입을 해체하는 형식은 쿠체가 도달하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중심과 주변의 자리 바꾸기. 존 쿠체 소설을 읽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당혹감은 일상을 살면서 자주 잊게 되는 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미 타자에게 그토록 연루돼 있었나?
채윤정 자유기고가
소설을 읽나요? 사람들에게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읽나.”
“독서클럽까지 결성해 소설을 읽다니 노력이 가상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때면 소설을
즐겨 읽는 나는 사회의 잉여 존재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상대방에게 이런
걸 묻고 싶어진다. 혹시 당신은 뭔가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편인가요? 예컨대, 자신에 대한
믿음들.
이렇게 묻는 건, 소설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모두 내가
몰랐던 남의 이야기, 옆집의 이웃부터 다른 성·인종·계급·민족의 이야기였다. 그 낯선
목소리에 일정 시간 머무르다 보면 수많은 차이로 이별하는 남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답들은 난처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물론 소설 읽기를 타인에게 직접 연루되는 ‘행위’라고 부를 수는 없다.
타인의 내부를 이해함으로써 나를 성찰하는 과정이긴 해도 사회적 행위라고 부르기에는
독서란 너무나 조용한 침묵의 과정이니까.
그런데도 존 쿠체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남의 내부를 이해하는 데서 나아가 뭔가
행위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존 쿠체가 집요하게 다뤄온 주인공들이 모두 경계에서
격렬하게 투쟁하는 인물이어서일까. 존 쿠체의 주인공들은 인종·언어·계급·성의 문제에서
중심과 주변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중심에서 밀려나며, 주변으로
들어갈 때 격렬한 통증을 겪는다. 국내에 최근 번역된 쿠체의 장편 <슬로우맨>
(들녘 펴냄)도 역시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다룬다.
<슬로우맨>은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 노인 폴 레이먼트가
주인공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백인 이민자이며, 자식도 가족도 없는
소심하고 차가운 성격의 남자다. 그에게 있는 건 사진사 시절에 벌어놓은 돈과 아파트,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초기 포슈리란 사진작가가 사람들을 찍었던 원본 사진
수집품뿐이다. 전적으로 남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장애인 처지에 놓인 노인 폴은
발칸반도 출신의 30대 간호사 마리야나에게서 간호를 받게 된다. 유부녀 마리야나를
폴은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폴은 마리야나의 사랑을 얻으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주려고 한다. 이 과정의 잡음들이 소설을 이룬다.
<슬로우맨>은 최근 세계의 노작가들이 탐닉하는 젊은 여성에 대한 노인의 사랑을
다룬다. 하지만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이나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
샐먼 루슈디의 <분노>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처럼 노인 남성 주체가 어린 여성을
사랑하면서 느끼는 심리적 슬픔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슬로우맨>은 이민자라는
위치를 이야기 내부에 포함시키면서 좀더 복잡한 사회학적 지점을 보여준다.
폴은 늘 간호사 마리야나가 발칸반도 출신임을 강조하며, 그에게 정확한 영어를
가르쳐주려 애쓴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원본 사진 수집품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에
역사가 있음을 알려주려고 한다. 폴은 항상 마리야나에게 베푸는 오스트레일리아 남성
주체로서 자신을 설정하려 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폴의 사랑 속 진정한 욕구는
마리야나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이민자 나라에서 가족과 언어와 역사를
새로 써내려는 열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심의 자리를 다시 되찾기 위한, 가족과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은밀한 열망! 과연 폴의 열망은 실현될까.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소설 중간에 생뚱맞게 끼어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인데,
코스텔로는 존 쿠체의 예전 소설 속 주인공인 여성 노작가다. 이 여성 작가의 출연이
소설 구조를 해체해 독자의 몰입을 망쳐버린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을 때 쿠체는
나름의 보답을 선사한다. 이 몰입을 해체하는 형식은 쿠체가 도달하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중심과 주변의 자리 바꾸기. 존 쿠체 소설을 읽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당혹감은 일상을 살면서 자주 잊게 되는 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미 타자에게 그토록 연루돼 있었나?
채윤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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