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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한겨레21 월요 독서클럽 <불안의 꽃>

앙스트블뤼테, 생애 마지막 꽃 [2009.01.09 제743호]
[월요일 독서클럽]
화려한 수사와 꽃잎처럼 섬세한 감정 라인으로 그려낸, 한 70대 자본투자가의 사랑 <불안의 꽃>

 

좋은 문학작품에는 ‘규격’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독자는 이 책 <불안의 꽃>이 매우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첫째, 너무나 길다! 둘째, 이해할 수 없는 구성과 구도를 갖고 있다. 왜 여자주인공이 중반 이후에야 등장하는지, 특히 책의 전반부를 장악하다시피 하는 자본 증식 찬가와 주인공 집안의 역사는 주제와 무슨 큰 관련이 있다는 건지. 반드시 그런 비중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주인공들의 대사는 독백이든 대화든 엄청난 장광설로만 이루어지는지. 또한 왜 주인공들은 이상하게 말을 주고받는지, 왜 그들의 대화는 저마다 한껏 과장된 에세이의 한 구절처럼 들리는지. 균형과 적절함이란 이 소설에서 가장 부족하며, 또 어울리지도 않는 성질이다. 작가가 가장 소망하지 않았던 성질이자 미덕.
작가 마르틴 발저는 <불안의 꽃>(문학과지성사 펴냄, 2008)을 완성한 당시(2006) 79살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79’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쓰다 보니 소설은 스스로 성장하여, ‘앙스트블뤼테’(Angstblute)라는 이름으로 피어났다. 앙스트블뤼테는 이듬해의 죽음을 예감한 전나무가 유난히 화려한 생애 마지막 꽃을 피워 올리는 현상을 말하는 아름다운 단어이며 이 소설의 원제다.
70대의 주인공 카를 폰 칸은 고급 취향과 예술적 도도함의 독일 도시 뮌헨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자본투자가. 그에게 자본 증식의 생태는 바로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며, 복리이자가 이자를 낳고 그것이 스스로 불어나가는 자유시장의 신진대사는 그에게 종교적 무아지경이나 마찬가지의 황홀경을 안겨준다. 카를에게 돈이 의미 있는 이유는 개인 독립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네가 필요한 돈을 타인이 벌어들이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카를에게는 종속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온 열정을 다 바쳐 돈의 증식에 몰두한다. 그에 비하면 돈의 소비란 얼마나 진부한 일인지 모른다.

이처럼 고집스럽게 독립을 추구한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카를은 거의 마흔 살이나 나이가

어린 여배우를 사랑하게 되고, 파국을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

그는 일방적인 사랑에 처참하게 종속된다. 앙스트블뤼테를 통해, 즉 시장에서 위기를 감지할 때

더욱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투자시장에서 살아남았던 카를은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사라져가는, 아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루전(Illusion)에 불과함을 예감할수록 더더욱

 그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결과는 비참했다. 애인의 오르가슴은 깜찍하게 연기된

것이었고, 애인의 애정은 거짓이었으며, 애인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바람처럼

떠나가버린다. 게다가 그의 ‘어페어’를 눈치챈 아내마저 집을 나가버린다. 70대의 카를은

혼자가 됐다. 그는 자신을 떠난 아내에게 이해를 구하는 장문의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 편지의 무서운 노골성에 스스로 놀라 결국 부치지 못하고 만다. 마지막 구절에서 독자는,

 점점 더 빠르게 하수구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욕조의 물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어차피 흘러가버려야 할 물이 헛되이 저항한다면, 그 얼마나 하찮은

종말이 되겠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인상은 주인공이 한국 문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입체적인

 인격을 가진 노년이라는 것과, 그것도 문학적 도덕성의 전통으로 볼 때 매우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직업과 세계관을 가졌다는 점이다. 또한 금융계에서 일하는 노인 주인공의 내면 독백이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한 수사와 비유, 꽃잎처럼 섬세하고 정교한 감정 라인들로 직조돼 있는데

 감탄하고 말았다. 이 소설은 눈부신 언어의 향연이며, 어디에서나 돈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돈과 관련된 욕망이 테마가 되지는 않는다. 작가가 문학에 대해 얘기하듯이,

 연인이 사랑에 대해 얘기하듯이 카를은 돈에 대해서 얘기할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직업형 캐릭터로 바뀌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슬프게도

직업에서 정신적으로 ‘독립’하기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심지어

 문학을 읽는다, 혹은 독서클럽을 한다고 말하면 대뜸 “관계자이기 때문이냐?”는 질문부터

 받기도 한다. 그 질문은 나에게 문학이 과잉 자체가 되어버렸다는 말로 해석됐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발저의 창작품인 주인공 카를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만약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면- 그러한 유리(遊離)로 인해 일생 동안 참으로 고독했으리라.

 카를은 이런 말도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비껴난 채 살아왔다.” 사랑을 잃을 것이

분명해진 어느 시점, 카를은 거리에서 만난 한 노숙자 시인에게 돈을 주고 그의 시를 산다.

‘가난은 한 송이의 꽃/ 민감한 이파리를/ 가진.’

이 바로크적 과잉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불안의 꽃, 앙스트블뤼테. 책 속에 나오는 볼테르를

빌려서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과잉은, 필수적이다”.

 

-배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