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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세계화의 하인들> 경향신문 책소개

[책과 삶]필리핀 아낙은 왜 세계의 하녀가 됐나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ㅣ경향신문


▲세계화의 하인들|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도서출판 여이연

고학력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집안일을 하고 아이나 노인을 돌보는 다른 여성의 존재가 필요하다. 보통 이 자리는 임금이 싼 저개발국 여성으로 채워진다. 한국사회의 ‘조선족 이모’가 그렇고, 이탈리아에는 루마니아계, 폴란드에는 리투아니아계, 그리스에는 스리랑카계, 대만에는 필리핀·인도네시아계, 미국에는 라틴계 가사노동자가 있다. 이들이 본국에 두고 온 가족들은 다른 가족구성원, 혹은 그들보다 더 하층계급의 여성이 돌보게 된다.

이 같은 ‘돌봄의 연쇄’ 혹은 ‘재생산노동의 국제적 분업’은 세계화의 한 특징으로, 국가 간·여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필리핀 출신의 사회학자(미 브라운대 교수)인 저자는 로스앤젤레스와 로마에서 일하는 필리핀계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의 과제를 제시한다. ‘필리핀’ 하면 ‘가정부’가 떠오를 만큼 필리핀 여성의 취업이주 비율은 높다. 전체 이주인구 650만명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고, 이 중 3분의 2가 130개 이상 국가의 가사서비스 부문에 고용돼 있다. 그중 로스앤젤레스와 로마는 필리핀 이주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기존의 이민여성 연구는 이주국가의 맥락에 따라 적응의 형태가 다르다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저자는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제공하는 공통의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에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양 지역의 비교문화분석에서 중요한 개념은 ‘탈구위치’인데 이는 ‘사회의 외부적 힘이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주체를 형성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즉 이들은 불완전한 시민권, 가족별거의 고통, 모순적인 계급이동이라는 경험, 이주민공동체 내에서 겪는 사회적 배제 혹은 무소속감 등 네 가지 위치에서 자신의 주체를 형성해간다.

이처럼 새롭고 유동적인 주체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진보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들은 불완전한 시민권에 대한 보상으로 ‘조국 필리핀’에 대한 향수를 키우고, 가족과의 별거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 위해 물질적 보상으로 대체하려 한다. 자신이 본국에서 받은 교육에 비해 낮은 수준의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바보로 비하하거나 중산계급 위주로 구성된 이주민공동체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노동력을 상품화한다.

저자는 선진국 커리어여성의 ‘친밀한 가족’을 떠받치기 위한 후진국 여성의 ‘초국적 가족’을 분석하면서 여성들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조가 유지되는 데는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당연시하고 사회적 노동에 비해 홀대하는 가부장제가 공통적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한다. 문현아 옮김. 2만2000원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