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화된 글로벌 자본주의 하,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공통된 경험
-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지음, 문현아 옮김, 『세계화의 하인들』, (여이연, 2009)
김영진(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1.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에서 재생산 노동을 하는 필리핀 이주여성들은 상이한 도착지에서 왜 유사한 경험을 하는가? 그러한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요인은 무엇이며, 이주여성 주체는 자신의 경험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세계화의 하인들』은 제목과 같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하인'이라는 공통된 역할이 이들 간의 비슷한 삶을 만들어냄을 보여준다. 저자는 거시, 중범위, 주체 수준의 분석을 종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들을 조건 짓는 젠더화된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거시구조를 밝혀내고, 인종, 계급, 젠더의 다양한 지배의 축이 겹쳐진 이들의 일상을 촘촘히 드러낸다. 2001년에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재생산노동의 전지구적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었고, 국내에서도 이주여성 연구 분야에서 이 책은 기본적인 참고서가 되었다. 특히 저자가 소개한 '재생산 노동의 국제적 분업'이라는 개념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젠더화된 이주의 정치학을 이주여성 연구자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이주여성들의 경험을 초국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아직은 빈약한 한국의 이주 가사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번역은 참 반가운 일이다. 번역은 가족과 젠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 온 문현아 선생님이 맡았다.
2.
저자가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를 연구대상으로 한 것은, 13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당대 여성이주의 가장 큰 규모를 보여주고 있고, 그들이 일하는 도시 중 로마와 로스앤젤리스가 이 여성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도착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두 곳의 필리핀 여성가사노동자의 경험을 비교연구함으로써 이들의 경험의 유사성을 발견하였고, 그 유사성을 만들어낸 근원을 탐색함으로써 이들을 조건 짓는 젠더화된 글로벌 자본주의의 거시과정을 밝혀낸다. 한마디로, 글로벌 경제에서 후기산업국 경제블럭의 저임금 서비스노동자라는 비슷한 역할이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이 여성들이 유사한 경험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유사한 경험을 '탈구위치'(dislocation)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한다. 탈구위치는 이주라는 사회적 과정에서 이주자들이 직면하는 난제이자 고통의 원천을 말한다. 저자는 심층면접과 참여관찰의 방법을 통해, 두 도시의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이 불완전한 시민권, 초국적 가족의 형성으로 인한 가족별거의 고통, 모순적인 계급이동, 무소속이라는 네 가지 공통된 탈구위치를 경험함을 드러낸다.
저자는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공통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거시구조, 중범위, 주체의 세 가지 분석수준을 사용한다. 거시구조 수준의 분석을 통해서는 이주의 큰 흐름과 유형을 결정하는 세계화와 그에 따르는 거시과정을 살펴본다. 여기서 세계화란 탈국가 금융자본주의로 촉발된 글로벌 재구조화를 말한다. 세계화의 거시과정으로 저자는 국가 간 불평등한 관계의 조직과 글로벌 노동분업, 후기산업국 경제블럭의 형성과 함께 성장한 글로벌 도시에서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의 수요 증가, 국제노동력의 여성화, 민족주의의 양극화 등을 언급한다. 중범위 수준의 분석에서는 거시구조와 행위자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사회네트워크, 집안과 같은 이주 제도를 검토함으로써, 거시수준의 분석에서 설명되지 못하는 이주와 정착의 특성을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주체(subject) 수준의 분석에서는 후기구조주의 주체이론을 활용하여 세계화라는 거시구조와 그에 따르는 제도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필리핀 여성 가사노동자의 주체위치(탈구위치)를 규명하려 한다. 즉, 인종, 계급, 젠더와 같은 다양한 지배의 축 속에서 규제되는 주체로서 이들이 구성되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주체를 구조에 의해 조건 지어지면서 활동하는 행위자로 개념화함으로써, 이들이 탈구위치에 조건지어져 있는 동시에, 매일의 실천 속에서 이 탈구위치의 영향력을 완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행위자의 딜레마'로 인해 이들의 저항은 자신을 조건화하는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소생시킨다.
『세계화의 하인들』에서 주목할 것은, 저자가 젠더를 필리핀 여성이주가사노동자의 이주와 정착의 경험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로 놓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라는 거시구조와 더불어, 필리핀과 도착지 양편에서의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남성과 독립적으로 필리핀을 떠나 선진국의 중류층 가정의 재생산 노동자로 들어가도록 하는 요인이다. 먼저 여성들이 필리핀을 떠나도록 하는 요인에서부터 젠더는 중심적으로 작동된다. 여성들은 경제적 빈곤뿐 아니라 가족과 노동시장에서의 필리핀의 젠더불평등에서 탈피하기 위해 독립적인 이주를 선택한다. 또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선진국의 중류층 가정의 가사노동자로 대거 들어가게 되는 원인에도 젠더가 그 중심을 차지한다. 선진자본주의 국가 역시 재생산 노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부담지우는 가부장제 사회로서, 전문직 여성은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남성과의 평등한 분담 대신 제3세계 이주여성의 가사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필리핀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선진국 가정에서 재생산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필리핀에 있는 더 가난한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구매하여 본국의 가족을 돌보게 한다. 파레냐스는 이처럼 '재생산 노동의 인종적 분업'(E. N. Glenn) 논의에 '세계화의 국제적 노동분업'(Saskia Sassen) 논의를 결합시켜, 이와 같은 현실을 '재생산 노동의 국제적 분업'으로 개념화한다.
3.
그렇다면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네 가지 탈구위치는 어떤 것이며, 이것들은 어떤 거시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가? 이러한 탈구위치의 영향력을 완화하거나 없애기 위해 여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이러한 저항은 어떻게 해서 다시 탈구위치를 소생시키는가?
첫째, 이들은 불완전한 시민권이라는 탈구위치를 경험한다. 이는 경제의 탈민족주의와 수용국에서의 정치의 재민족주의라는 민족주의의 양극화경향에서 생겨난다. 경제의 탈민족주의화는 글로벌 경제로 인해 생겨난 저임금 가사노동자에 대한 높은 수요를 빈곤국이 대응하도록 종용한다. 그러나 수용국에서의 정치의 재민족주의화는 빈곤국에서 온 이주민들의 시민권 획득을 가로막고, 이들이 본국에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도록 한다. 여성들은 불완전한 시민권이라는 탈구위치에 맞서 필리핀을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구성하는데, 이는 기존의 탈구위치를 유지시킨다. 이것은 수용국의 반(反)이민 정서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완전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초국적 집안을 형성함으로써 가족 별거의 고통을 경험한다. 초국적 가족은 지역간 불균등 발전, 수용국에서의 이민배척주의와 제한적 통합조처와 같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힘에 대해 여성들이 대응함으로써 생겨나는데, 이는 기존의 세계화의 불평등을 유지시킨다. 수용국이 이들 가족의 재생산을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이주의 저임금을 보장받게 함으로써 수용국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초국적 가족의 형성은 어머니노릇이라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함께 작용하여, 여성들이 무기력, 후회, 죄의식과 같은 감정적 고통을 경험하도록 한다. 이들은 가족별거의 고통과 협상하기 위해 정서적 긴장을 억압하고 초국적 집안을 통해 제공할 수 있는 물질적 혜택이 정서적 비용을 압도한다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정서적 긴장을 억누르는 것은 가족 재결합을 지연시켜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며, 이런 긴장은 물질적 안전함에 의해서 상쇄되지도 않는다.
셋째, 이들은 모순적 계급이동이라는 탈구위치를 경험한다. 이주를 통해 재정적 지위는 올라가지만 사회적 지위는 하락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감정적 고통을 겪는다. 이 탈구위치는 지역간 불균등 발전, 교육자질에 대한 국가중심적 위계로 인해 발생한다. 이에 맞서 가사노동자들은 필리핀에 돌아가 자신이 다른 가사노동자들의 시중을 받는 인생역전을 꿈꾸거나, 고용주가 흑인, 남미계 노동자보다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의 인종적 지위를 강조한다. 또한, 고용주에게는 권위의 원천이 되는 친밀함을 활용하여 시중드는 일을 덜 강조하거나, 고용주가 만들어놓은 '복종과 모성'이라는 각본에 따르는 동시에 이를 조작함으로써 전복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자신을 모순적인 계급이동이라는 탈구위치로 몰아넣은 보다 큰 구조적 불평등에는 묵종하는 것이다.
넷째, 이들은 이주민공동체에서 무소속이라는 탈구위치를 경험한다. 이들은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이주민 공동체에서 소외감과 연대감을 동시에 느끼는데, 저자는 이를 '아노미'와 '연대'의 공존으로 표현한다. 로마에서 이들이 느끼는 소외의 원천은 이주민들을 준(準)성원으로서만 허용하는 지배적인 이탈리아 사회에 있다. 로마를 빨리 떠나야 한다는 긴박감은 돈을 번다는 초현실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이주민 공동체 내에 과도한 상업화의 관례를 만들어냄으로써 아노미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서로의 사업을 지지하면서 연대를 구축하기도 한다. 이들은 무소속의 탈구위치에 대한 타협책으로서 스스로를 외부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소규모 사업에 종사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공동체 네트워크는 이들의 진정한 성공을 막음으로써 탈구위치를 더욱 강화시킨다. 한편 로스앤젤리스의 이주민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무소속의 탈구위치는 그 원천이 중간계급 중심의 이주민공동체에 있다. 이 속에서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감정, 즉 아노미를 겪게 된다. 그러나 중간계급의 존재는 한편으로 가사노동자들 사이에서 연대를 만드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가사노동자들은 탈구위치에 대한 대응으로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더 구분시키려 하는데, 이로 인해 이들이 겪는 아노미는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4.
『세계화의 하인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첫째,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탈구위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파레냐스는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필리핀 여성가사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비교연구를 함으로써 이들의 유사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핵심적 요인이 글로벌 재구조화와 그에 따른 거시과정임을 밝혀냈다. 그런데 최근에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파레냐스가 말한 글로벌 재구조화의 위기로서, 거시구조의 큰 변동을 의미한다. 글로벌 경제의 위기는 어떤 거시과정을 새로이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탈구위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둘째, 한국에 있는 중국 조선족 여성이주가사노동자의 탈구위치를 만들어내는 거시구조와 사회적 과정은 무엇인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조선족 이주여성과의 비교연구가 필요하지만, 아직 그러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파레냐스 자신이 말하듯, 『세계화의 하인들』은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특정한' 탈구위치를 규명한 연구로서 이는 조선족 여성을 비롯한 다른 지역, 다른 가사노동자들에게까지 일반화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족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탈구위치에 대한 비교연구는 별도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때 파레냐스의 연구는 훌륭한 분석틀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분석의 하나의 준거, 모델이 될 수 있다. 한국과 타국 도시의 조선족 여성 가사노동자들의 비교연구를 통해 도출되는 탈구위치의 유사성은 두 지역에 미치는 거시구조 과정을, 탈구위치의 차이는 한국사회와 다른 나라의 특수한 응접의 맥락(context of reception)을 드러내줄 것이다.
셋째, 여성이주가사노동자들을 조건 짓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 연구는 당시까지의 이주연구와 달리 주체수준의 분석을 포함시킴으로써 이주여성의 행위자성을 드러내었다. 탈구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대응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구조에 종속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기존 구조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후기 구조주의 이론의 "행위자의 딜레마"는 저자의 행위자성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기력한 느낌을 준다. 저자는 버틀러의 푸코식 주체설명을 가져와, 행위자가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였고, 탈구위치에 맞선 여성들의 기존의 대응을 "정치적 행동으로 전환시키고, 이를 통해 권력을 덜 소생시키면서 더 크게 저항하는 방법을 도출하는 것"이 조직가들의 당면 과제라는 말과 함께 책을 끝맺는다. 이 책이 지구적 맥락 속에 위치한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경험이라는 현실을 촘촘하게 그려냈다면, 우리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라는 행위자가 자신들을 조건 짓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적,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이혜경, 정기선, 유명기, 김민정, 2006, 이주의 여성화와 초국가적 가족 - 조선족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제40집 5호, pp.258-298
김현미, 2008, 중국 조선족의 영국 이주경험: 한인타인 거주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41-2(2008.11), 한국문화인류학회, pp.3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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