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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한겨레21 월요 독서클럽 <어느 섬의 가능성>

늙지 않는 세상에서의 성적 판타지 [2009.01.30 제745호]
[월요일 독서클럽] 죽거나 사랑하거나, 노회한 냉소주의자 미셸 우엘벡의 교묘한 전략 <어느 섬의 가능성>

 

“삶은 오십부터 시작이다. 그건 맞다. 삶이 마흔에 끝난다는 것만 빼놓고.”

늙어서 죽는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늙는다는 사실이 분해서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열린책들 펴냄)은 늙어가는 남자들이 경험하는 분노와 치욕을 사랑의 유토피아로 포장한 소설이다. 남자들이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우엘벡은 젊음·아름다움·새로움만을 숭배하는 성적 파시즘의 세계로 끊임없이 도피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성적) 결핍과 불만족이 그에게는 소설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뒤에 출현한 신인류는 노화와 죽음을 모른다. 자궁을 빌려서 태어난 존재들이 죽음을 통해 세대를 잇는 것과는 달리, 신인류는 DNA 복제를 통해 앞선 세대의 기억을 이어받으면서 언제나 성인으로 태어난다. 신인류는 불행으로 상처받지 않고, 연민으로 눈물 흘리지 않으며, 잔인한 웃음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엘로힘 신도들이 소망했던 것처럼 그곳은 모든 형태의 성애가 허용되지만, 육체적으로 합일하려는 사랑의 충동으로서의 성관계는 없다. 그런 성관계가 어디에도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성적 유토피아의 세계다.

신인류인 다니엘24가 까마득한 조상이었던 원본 다니엘(과 그의 카피들)이 남겨놓은 <삶의 이야기>를 읽고 그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교차 편집되어 있다. 다니엘24는 신인류의 관점에서 원본 다니엘의 세계와 그가 살았던 이해하기 힘든 시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다니엘이 살았던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이자 범죄다. 온갖 성관계가 자유로운 그곳에서도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늙은이의 사랑이다. 늙은이의 사랑은 주접이고 추문이다. 늙은이는 최악의 사회적 약자다. 늙어가는 남성의 수치심과 자괴감이 처절하면 할수록,

늙고 남루하여 성적 매력이라고는  개뿔도 없는 주제에 주체적이기까지 한

 여자들에 대한 그의 증오심 또한 증폭된다.

그들과 눈만 마주쳐도 다니엘에게는 자신의 노화와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공포가 떠올랐을 것이다. 거세된  자신의 모습은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바로

 그런 누추한 여자들의 눈빛을 통해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니엘의  여성 혐오는 죽음에 대한 남자들의 공포와 다르지 않다.

그런 공포를 잊기 위해 재력과 권력을 가진 늙은 남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자를 소비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불안의 꽃’처럼 사랑의 감정이 찾아와 젊은

여자의 몸이 아니라 그녀와의 진정한 합일을 원하는 순간 다니엘은 파멸한다.

모든 성을 상품처럼 소모하는 소비자본주의가 자연환경이 되어버린 어린 여자에게

오십대 아저씨의 사랑 타령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젊은 여자에게서  진실한 사랑까지 바라는 순간 모든 면에서 강자였던 늙은 남자는

패자로 전락하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젊은 여성이 모든 걸 가진 지배계급의 남성을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은 젊음이 주는 배신의 권리에서 비롯된다.

다니엘이 꿈꾸었던 완벽한 합일로서의 성적 결합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핏속을 간질이며 돌아다니던  달빛이 나비 되어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성적

열락의 상태는 깊은 우물 바닥에  놓여 있는 죽음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손가락으로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나비들은 우리가 죽어서 누워 있을 때

 부패한 주검으로부터  변태되어 나오는 나방들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삶이 베풀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서 사랑은 덧없이

사라지므로 아름다운 것이자 부패하는 시간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중년 남자의 회한과 치욕을 그야말로 입에 거품 물고 뿜어낸다.

<플랫폼> <소립자>에 이어 여기서도 발기에 목매는 어이없는 마초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우엘벡의 세계가 보여주는 수상쩍은 성적 파시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까닭은 그런 논리들을 완벽한 사랑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위장하는 교활한 서사 전략

때문이다. 죽거나 사랑하거나. 우엘벡의 소설에서 이것은 마치 모든 인간의 보편적 조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처럼 사랑의 환상마저 남김없이  찢어버릴 경우,

그런 아찔한 심연과 철저한 고독과 대면하려면 독자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랑의 섬에 기댄 채 죽어가는 남자들이 늘어놓는 자학과 자조는 어느새 독자로서의

나에게 연민과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다니엘이 쏟아내는 지독한 사랑의 환상으로 인해 짠한

마초인 다니엘과 나 자신을 그처럼 쉽게 동일시하다니! 그것이 바로 노회한 냉소주의자로서

우엘벡이 노리는 있는 교묘한 전략인 것을!

 

-임옥희 <여성이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