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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임옥희 <채식주의 뱀파이어의 불안>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불안

 

흑백 필름처럼 젠더가 오직 남녀만으로 구성되지 않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프리즘을 통과하면 백색광이 무지개 색깔로 변하는 것처럼, 양극화된 젠더 사이에 다채로운 젠더 스펙트럼이 전개된다면 말이다. n개의 젠더들이 다양한 성애를 연출하는 세상은 지적 호기심과 시적 상상력으로 넘치는 젠더의 정치경제학적 공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보수주의자들의 공포처럼 무질서와 카오스의 세계가 될 것인가? 인류문명이 차별 없는 사회(성차별·인종차별·외국인혐오·동성애혐오)를 지향해왔다고 가정한다면, 다양한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레즈비언 아닌 트랜스섹슈얼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로 알려진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1928)은 런던에서 출간되는 즉시 금서가 됐다. 여성동성애를 사실적으로 다뤘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고독의 우물>은 반레즈비언 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스티븐은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스티븐이 여성에게 보내는 사랑은 동성애로 포장한 이성애로 볼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후세대 레즈비언들은 <고독의 우물>에 대해 반감을 보이는 반면, 트랜스섹슈얼들은 이 소설을 자신들의 기원 서사로 삼으려 한다. 스티븐에게서 완벽한 남성에 도달하려는 트랜스섹슈얼의 이상(FTM·여자에서 남자로 되기)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독의 우물>에서처럼 여성동성애의 형상화가 비탄과 비극이 아니라 여유와 유머로 다뤄지려면 재닛 윈터슨의 소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 소설에서 동성애 코드는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을까? 최근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가 동성애다. 그럼에도 동성애가 단지 새로운 소재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다뤄지는 작품은 흔하지 않다. 은희경의 단편인 <아내의 상자>에서 동성애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일종의 재앙이다. 이 단편에서 화자이자 남편인 ‘나’는 자신을 극히 상식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상식적인 남편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내가 ‘그린파크 모텔’에서 알몸으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이 단편에서 동성애는 죽음과도 같은 잠과 우울로 등치된다. 자신을 기만한 아내에게 남편이 복수하는 방식은 이혼이 아니라 유폐였다. ‘나’는 닭장차에 실려가는 닭처럼 아내를 정신병원에 내다버린다. 상식적인 이성애자 남편을 통해 아내의 동성애를 미리 처벌함으로써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교활한 서사 전략이 이 단편에는 잘 짜여 있다.  
 이와는 달리 천생 이야기꾼인 천명관의 <고래>에는 한때 이성애자였던 여자가 늙어가면서 게걸스럽게 젊은 여자를 탐하는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수다스런 이 소설에서 재력과 권력이 있는 늙은 여자는 가난하지만 젊은 여자의 몸이 주는 아름다움을 욕망한다. 그것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늙은 남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자를 소비하는 것과 흡사하다. 아무리 신화적인 성욕과 에너지를 가진 여자라 할지라도 늙어가는 여자의 몸은 그 가치가 급격히 하락한다.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의 싱싱한 몸을 보면서 자신의 젊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 것이 이 소설에서는 뜬금없는 동성 간의 성행위로 형상화된다. 젊음을 자기복제하려는 나르시시즘적인 동성애야말로 회춘에 대한 향수를 시적인 은유로 동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천운영의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아내에게서 벗어나려는 늙은 남자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동성사회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윤리로 포장한다. 누드 사진을 찍는 화자인 그는 우연한 시비 끝에 자기 사진관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18살짜리 ‘녀석’에게 이끌린다. 녀석은 할머니와 둘이 사는 조손가정의 소년가장이다. ‘녀석’과 함께 지내면서 화자는 젊고 탐욕스런 아내에게 짓눌려 사는 늙은 남자가 아니라 햇살에 눈부신 물방울을 떨구면서 말끔한 허벅지로 자맥질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끊임없이 사업체를 키우고 욕망으로 팽팽한 몸을 유지하는 자본주의적 인격의 아내에게서 결정적으로 벗어나는 사건이 ‘녀석’과의 만남이었음에도 이 단편은 그의 욕망을 동성사회적인 것으로 승화(?)시킨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생물학적인 섹스로서 남자·여자는 해체됐지만, 기원 없는 젠더로서 여성성·남성성, 수동성·능동성은 여전히 남아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담론 너머에 억압받는 동성애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서 우는 사람들은 남자다. 흔히 눈물은 여성의 것이고, 남성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이야기됐다. 그런데 이 단편에서 여자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오히려 아버지다. 여기서는 눈물의 젠더 규범이 교란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가 울지 않을 때는 영원한 소년으로서 울지 않는 것이다. 그 소년은 미숙아로 태어나 장롱에 방치됨으로써 숨을 거둔 그녀의 남자동생이었다. 그 아이는 37살인 ‘나’ 안에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 그녀에게는 ‘게이 점쟁이 기치료사 보조작가’ 파트너가 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나’는 부치로 통(通)한다. 그와 동시에 10년 넘게 불륜 관계를 맺어온 남자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여자로 가장해 눈물을 흘린다. 눈물로 떠나려는 남자의 마음을 붙잡았다면 그녀는 눈물을 통해 다시 여성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처럼 젠더의 가면무도회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언제라도 자리바꿈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섹슈얼리티 또한 언제라도 이성애·동성애로 연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동성애는 아무런 위험 없이 소비되는 다양한 성행위 중 하나일 뿐이다. 다양한 형식의 이성애로 변형된 동성애는 사회적 처벌을 완화하는 대신 그것의 섹슈얼리티는 탈성화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결과 담론 속에서 동성애는 현란하게 소비되지만 담론 너머에 존재하는 동성애는 여전히 억눌려 있다.  
 동성애 코드와 더불어 다른 한 축으로는 자본이 극대화한 욕망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육식을 거부하는 소설이 등장한다. 한때 레즈비언 채식주의자야말로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농담이 있었다. 이성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라는 것만으로 정치적이며,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채식을 하는 것만으로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캐럴 애덤스와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 성적 소수자와 더불어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과 연대하는 정치적 실천으로서 육식을 거부한다. 동물 해방과 더불어 육식 거부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폭력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보살핌의 윤리이자 유비적으로 그것이 여성주의의 윤리로 간주된다. 그런데 육식 거부가 여성적인 ‘배려와 보살핌’의 윤리와 곧장 연결될 수 있는가? 동물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동물이 인간에게 완전히 정복됐을 때 나올 수 있는 태도다. 채식주의 레즈비언들이 육식에의 불안을 과도하게 느끼는 것도 악어의 눈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한강의 소설은 육식에의 불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 이 시대에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가해자임을 드러낸다. <채식주의자>에서 아내는 육식을 거부하다 마침내 불감증과 거식증에 이른다. 육식에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단지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다. 아내는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먼저 죽는다.

 

육식 거부는 ‘악어의 눈물’
<내 여자의 열매>에서 그녀는 햇살과 비와 바람과 별빛으로 살아가는 나무가 되고, <채식주의자>에서 그녀는 나무 되기를 넘어서 세상 너머로 걸어가버린다. 육식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채식을 한다지만,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계를 내 안으로 삼켰다가 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식인(食人) 주체의 우울한 운명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는 한 타자를 삼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식인 주체는 외부의 타자들을 삼키고 소화시켜 자기 몸으로 육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식인 주체는 자기가 처한 딜레마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비탄이 그녀의 영혼을 형성하게 된다. 식인 주체는 자기 소멸에의 충동을 채식과 육식 거부를 통해서 말한다. 그것이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우울한 아이러니이자 윤리이지 않을까?
 
글/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이며 작가들의 책 읽는 모임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이다. 저서로는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