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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여이연/서평

임옥희 <우리는 얼마나 휘황한 언어에 중독되어 있는가>

한밤중 도심의 상가. 손에 휴지통을 든 소녀가 서 있다. 나이에 맞는 인형이 아니라 휴지통을 들고 서 있는 소녀라니. 뜬금없고 기괴하다. 소녀는 부모가 누군지, 집이 어딘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소녀는 직무상 이것저것 물어보는 경찰에게 자기 나이가 열네 살이라고 답한다. 경찰은 소녀를 정신지체로 여겨 아동복지원에 넘긴다. 아동복지원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가혹한 행위나 비참한 사건은 없다. 소녀는 복지원에서도 잉여인간이다. 교육을 받지만 낙제해 같은 학급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소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심하게 앓아서 병원으로 이송되고 갑자기 늙어버린다. 의사가 데려온 늙은 부인이 울면서 자기가 소녀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죽어가던 늙은 아이는 천천히 눈을 뜨고서 “당신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네요”라고 한다.

옛 동독 출신의 젊은 여성 작가인 예니 에르펜베크의 <늙은 아이 이야기>(솔출판사 펴냄·2001)의 스토리다. 카프카의 우화처럼 간결하다. 소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소설적인 정보 또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소설에서의 갈등·고뇌·복선과 같이 독자에게 극적 재미와 지적 허영을 만족시켜줄 만한 요소도 없다. 이 소설은 텍스트를 제대로, 철저히, 완벽하게 읽고 해석하겠다는 독자의 강박에도 저항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휘황한 언어와 넘쳐나는 스토리에 얼마나 중독된 채 살았던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설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한 독자에게는 낯선 방식의 소설이다.

소녀는 또래들보다 덩치가 엄청 크다. 얼굴은 달덩이처럼 부풀어 있고, 몸의 윤곽은 살에 파묻혀 있다. 거대한 덩치의 소녀는 부패한 죽음 덩어리 같다. 소녀에게 전달된 정보와 지식은 구멍이 숭숭 뚫린 뇌에 각인되지 않는다. 소녀는 자신을 철저히 지움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시키는 심부름과 말들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전달하는 투명한 운반자가 된다. 소녀는 주변의 이야기들을 듣지만 침묵 속에 보관한다. 니콜이 짝사랑한 수학 선생님 이야기, 뵈른이 저지른 좀도둑질에 이르기까지. 소녀는 “심장을 감싼 강철 띠에 아이들의 독백을 꿰매 넣는다.”

하인의 마음을 가진 소녀는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가장 낮은 자리가 그저 편안할 뿐이다. 자본주의적 발상으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이자 남들과 경쟁하면서 남들보다 나아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존재들이다. 뿐만 아니라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감옥·강제수용소·복지원과 같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을 견딜 수 없어한다. 하지만 소녀는 울타리 쳐진 곳 중 하나인 아동복지원에 자발적으로 “침입한다”.

구태여 이 소설을 우화로 읽는다면, 옛 동독 출신 작가인 에르펜베르크가 소녀를 옛 동독인으로 설정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된 독일 사회에서 옛 동독 시민들은 이등 시민이고 내부 식민지인이다. 복지원과 같은 공산국가로부터 보호받았던 옛 동독인들은 이제 자본주의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채 휴지통을 들고 서 있는 소녀와 다를 바 없다. 옛 동독인들은 자기 체제의 지독한 부패, 비효율성, 관료주의, 무능한 정부의 무기력증 등에 혐오를 느끼고 체제 비판을 했지만 그 대안을 딱히 자본주의로 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경쟁과 속도전을 절망적으로 뒤쫓아가거나 자본주의의가 방출한 폐기물을 담는 휴지통이 되거나이다.

그런 좌절이 마냥 열네 살에 머물고 싶은 소녀의 간절한 심정으로 표현된다. 처음에는 지진아처럼 보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늙고 지친 그러나 ‘현명한’ 아이에게 우리 모두 속았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열네 살이라고 말했던 엄청난 덩치의 소녀에게서 살이 빠져나가자 서른 살 여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서 행복한 시절에 멈춰 있으려던 늙은 아이의 장난은 좌초한다. 이 소설은 서른 살의 여자가 열네 살의 정신지체아를 연기한 것에 독자들 또한 동참하고 싶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그녀의 행복하고 굴종적인 퇴행 욕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