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금서’ [2010.02.26 제799호] |
[월요일 독서클럽] 중국 인민의 몽매성을 그렸다고 중국 본토에서 번역 금지된 중국계 작가 하진의 <기다림> |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면 읽고 싶은 마음이 반감된다. 그 정도 대중성과 상업성을 갖춘 책이라면 구태여 나까지 읽어줄 필요는 없잖아, 라는 반감이 작용한다. 그와 반대로 어떤 책이 금서가 되었다 하면 기필코 읽어야겠다는 호기심이 증폭된다. 금서는 읽으라고 권하는 수상작보다 훨씬 더 읽고 싶은 법이다. 하진의 <기다림>은 나의 비틀린 욕망을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서구의 인정을 받으려는 문화적 열등감과 과도한 자민족 우월감이 뒤섞여 고약한 심술이 발휘되기도 한다. 중국계 작가인 하진의 소설 <기다림>(김연수 옮김·시공사 펴냄)은 1세계에서는 넘치는 찬사를 받았지만 막상 중국 본토에서는 번역이 금지됐다. 중국 본토 지식인들은 하진의 <기다림>이 중국 인민의 몽매성과 후진성을 보여줌으로써 중국을 봉건적이고 야만적인 국가로 형상화했다고 비난했다. 1세계인들의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는 원시적 풍경(전족, 문화혁명, 무지와 무식, 전근대적 미신)들이 중국인의 자존심과 체면에 상처가 되었다. <영혼의 산>의 작가 가오싱젠은 200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그는 조국의 수치를 팔아서 자신의 명예를 취득한 배신자로 취급받았다.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한 그가 노벨상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공산 중국의 인권 탄압과 정치 탄압을 매도함으로써 반대급부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확보했던 서구 언론으로부터 이들 작품이 찬사와 귀염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국 본토인들의 심기를 거슬렸다. 중국 정부의 금서 조처는 중국 정부가 서구인들의 기대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음을 또다시 보여준 사례였다. 문화혁명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하여 금서로 삼는 것이야말로 문화적 탄압을 자행한 문화혁명의 코믹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하진의 <기다림>은 당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미신이 지배했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의사인 쿵린의 이혼과 재혼. 쿵린은 그 시절까지도 전족을 하고 있는 시골 무지렁이 아내인 수위와 이혼하려고 17년을 기다린다. 그는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했다. ‘얼굴이 밥 먹여주지 않고’ ‘미색도 2년이면 빛이 바랜다’는 것이 늙고 병들어 수발이 필요한 부모의 변이었다. 린은 잘생기고 교양 있는 군의관이다. 그의 처 수위는 마음은 미색이나 얼굴은 박색이다. 더 이상 못생길 수가 없다. 스무 살인데도 마흔으로 보이고 거친 노동으로 손등은 거북이 등껍질 같다. 린은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는 도시 처녀 우만나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지극히 당연한 사랑처럼 보인다. 이혼하기 위해 그는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고향을 방문한다. 해마다 법원에 가지만 마지막 순간에 수위의 마음이 바뀐다. 수위는 마을 나무처럼 버티고 어린 딸은 해가 바뀔 때마다 쑥쑥 커간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린은 차마 이혼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문화혁명기에 부르주아식(?) 자유연애는 쉽지 않았다. 우만나 또한 린이 이혼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간호학교에 입학하려면 처녀성 검사까지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고, 혼외 연애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약혼한 사이가 아니면 병원 규정상 남녀가 병원 담장 너머에서도 함께 거닐 수 없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돈이 사랑보다 중요한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한다. 법적으로 한 자녀만 허락하는 시대에 만나는 쌍둥이를 낳는다. 일석이조일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기다림의 반전은 이때부터 또다시 시작된다.
린의 자기 연민에 가득 찬 기다림, 조강지처인 수위의 하염없는 기다림, 만나의 자멸적 기다림이라고 하면 아, 우유부단한 남편, 희생하는 조강지처, 신경질적인 신여성의 짜증스러운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복잡한 인생살이와 섬세한 감정의 결들은 무 자르듯 단박에 해소되지 않는다. 군더더기 없는 경제적인 문체, 우울한 유머, 잔인한 아이러니로 인해 한없이 소박한 기다림의 이야기는 더없이 풍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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