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연 이론 06] 언어 - 문자언어는 과연 존재의 집일까?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유를 문자언어에서 찾은 바 있다. 문자언어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 성경의 바로 그 <말씀>이다. 말씀, 즉 로고스는 수천 년 동안 서양의 역사, 문화, 사상의 대성당을 구축한 든든한 기둥이었다. 로고스는 보이지 않는 신이 오직 문자를 통해서만 현현하는 ‘책의 종교들’을, 그리고 리얼리티에서 추상화된 플라톤의 혹은 데카르트의 사상 건축물을 구축해 왔다. 따라서 뚜렷한 논리, 명징(明徵)한 이론의 견고한 대지인 로고스가 지배하는 세계는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질서 체계이다. 반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히스테리’는 끊임없이 이 질서의 견고한 대지를 교란하는 비이성과 비합리의 세계이며, 뒤집힌 로고스의 세계이다. 하지만 문제는 두 세계 모두 <언어>라는 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스테리는 모순성 혹은 모순 자체를 가르치는 위대한 교사이다. 히스테리는 언어와 사유가 이룩해놓은 논리의 세계의 뒷면을 들춰낸다. 논리를 놀리기라도 하듯, 질서와 합리로 구축된 이성의 세계를 상대로 한판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문화의 모든 영역들이 결집되는 접점에 히스테리가 놓여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문화의 모든 영역에 공통되는, 경우에 따라 히스테리로 표현되거나 히스테리가 저항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역학이 있다고 가정한다. 저자는, 언제나 해석과 분석의 대상이었던 히스테리를 통해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분석자와 분석 대상을 전도시킨 이 새로운 탐구 방식으로 철학과 의학, 자연과학과 신학을 서로 연결시키는 견고한 ‘체계’를 교란하여 여러 겹으로 구성된 세계를 해석하는 저 보이지 않는 끈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의 병’을 실마리로 삼고 있지만 ‘여자들만의 책’은 아니다. 여성적인 것의 억압이나 여성이 맡은 희생자 역할, 혹은 성들 상호간의 관계보다 그러한 관계에 이르게 된 과정을 중시한다. 여자 못지 않게 남자도 어떤 발전 과정의 꼭두각시이며, 이 발전 과정에서 성적 존재가 점차 말살되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더 수동적인 꼭두각시였는데, 이유는 ‘지배권’이 남자에게 보장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자신을 지배하던 그 힘에 조금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할 분배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몫을 받았던 여자는 히스테리와 같은 거부의 기제를 발전시켰다. 히스테리는 꼭두인형의 사지를 그 위대한 인형조종자(역사의 역학 혹은 자기법칙성)가 조절하는 것과 다르게 춤추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지만 문자는 그가 창출한 조건과 법칙(논리)를 통해 인간을 종속시키려 한다.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의 언어가 거짓말, 즉 히스테리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히스테리적 사유로 세계의 관계구조를 파악해 보라고 권고한다. 히스테리적 사유 방식은 여러 겹의 세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폭넓은 시선을 제공한다. 히스테리는 서구의 사유가 말하고 있는 육체의 질서정연한 법칙과 기능을 비켜남으로 해서 ‘육체기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 기계는 언제나 같은 법칙에 따라 작동할 때에만 재생산과 연속생산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기계가 아니다. 이것이 히스테리의 존재이유이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 1부 히스테리와 성령”, 즉 1장과 2장은 수백 년에 걸친 권력싸움의 두 주인공들에게 바쳐져 있다. 히스테리가 어떤 식으로 정의되어 왔는가 하는 개념의 역사를 1장에서 밝힌 뒤, 싸움의 두 주인공인 로고스와 ‘위대한 거짓말쟁이’인 히스테리의 대립과정을 2장에서 서술한다. “2부 대성당: 건축 해체 결함”은 이 두 적대자들과 로고스의 권력으로 인한 발전과정을 생식능력, 수태능력, 섹슈얼리티, 그리고 언어(넓은 의미의 ‘문화능력’) 등의 특정 영역에 관련지어 기술하고 있다. 이 영역들은 다른 영역들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중 중요한 것은 성적 존재의 중성화 과정에 대한 기술이다. 즉 대성당 건축의 주춧돌을 이루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존재Mutterschaft’, ‘모성Mutterlichkeit’, ‘에로스’, ‘언어능력’ 등의 개념들을 통해 그 대성당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 나은 어머니들”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언어”라는 제목이 붙은 두 장이 무엇보다도 성적 존재로서의,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여자의 파괴를 다루고 있다면, 그 다음 장인 “대문자 자아와 무(無)”에서는 남자의 파괴가 다루어지고 있다. “남자의 히스테리 혹은 위대한 남자에서 시시한 남자로”에 관한 장에서는 파멸해 가는 남성의 성적 존재에 대한 때늦은 깨달음과 19세기 남성 히스테리라는 ‘유행’이 일으켰던 변혁을 다루고 있다. 제 3부 “이제는 파라다이스”에서는 저자가 대략 1900년으로 잡은 변혁 이후의 시기가 다루어진다. 히스테리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모든 개념 뒤에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리얼리티와 추상이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이 둘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서 있다),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두 개의 리얼리티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추상은 리얼리티를 억압하는 한편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리얼리티는 그 추상을 배척한다. 여기서 ‘인공자연’, ‘인공육체’ 그리고 ‘인공 리얼리티’가 생겨난다. 무엇보다도 ‘인공여자’ 그리고 ‘인공자아’ 즉 육체가 되어버린 ‘대문자 자아 ICH’가 탄생한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은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한 두 개의 표상을 지닐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리얼리티를 가지는 것이다. ‘불완전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자’가 있고, 추상으로서의 ‘여자’의 이미지가 있으며 ‘인공여자’가 있으니, 이 ‘인공여자’는 추상적인 이미지에 적응된 그리고 육신적 리얼리티가 된 여자인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보게 될 거식증은 이 새로운 ‘인공육체’ 또는 ‘인공여자’의 탄생에 상응하는 히스테리적 거부의 한 형태이다. 모든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 의미차원에 상응하면서, 20세기의 히스테리 역시 완전히 다른 세 개의 얼굴을 취하게 되었다. 우선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리얼리티와 추상의 대립을 명백히 해주는 저 ‘초기(점차 소멸해가는)의 히스테리’가 있다. 다음으로 좀 더 새로운, 서로 뒤바뀔 정도로 유사한, 그럼에도 합일될 수 없는 대립물로 고찰되어야 하는 두 개의 리얼리티의 실존을 명백히 보여주는 ‘거식증 히스테리’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스테리의 세 번째 형태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일종의 ‘인공 히스테리’로서 여기에서는 소문자 자아의 자리에 대문자 자아가 들어서 있다(앞의 두 히스테리는 바로 이 소문자 자아의 유지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인공 리얼리티의 부가적 현상, 아니 그 증후인 ‘집단 히스테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히스테리가 ‘병’으로 고찰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건강의 증후’로 읽혀야 할 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소문자 자아를 선택할 것인가 또는 대문자 자아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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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로마에서 태어나 미국과 독일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1981년까지 파리에서 자유기고가 및 영화감독으로 활동했고 2004년 현재 베를린 훔볼트대학 문화학교수이자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엄양선 숙명여대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뮌스터에 있는 베스트팔렌 빌헬름 대학에서 수학했고, 2007년 현재 숙명여대에서 강의하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계를 움직인 6인의 전략가>, <히스테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린 마술그림>,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춤 - 즐거운 지식여행 014>, <구스타프 클림트 - Art Special 2> 등이 있다. |